개혁 개방의 설계사 등소평(鄧小平)

 
쓰촨성[四川省] 출생. 1918년 프랑스로 유학, 1921~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, 그후 모스크바의 중산(中山)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[廣西]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.

1933년 반주류였던마오쩌둥[毛澤東]을 지지하고, 장정(長征)에 참여하였다.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(八路軍)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, 1949년 장강(長江)도하작전과 난징[南京]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) 수립에 공을 세웠다. 1952년 정무원(政務院) 부총리,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,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.

한편 류사오치[劉少奇]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,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.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때 홍위병(紅衛兵)으로부터 반모주자파(反毛走資派)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.

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[周恩來]의 추천으로 복권되어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,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(四人幇)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.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죽고 화궈펑[華國鋒]이 저우언라이 계열의 노간부인 예젠잉[葉劍英], 특무부대장인 왕둥싱[汪東興]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.

그후 화궈펑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. 이때부터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였다.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, 지방분권적 경제운영, 엘리트 양성,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. 1989년 6월 톈안먼[天安門]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 보였으나 위기를 수습하고,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했다. 1997년 2월 19일 사망했다.

[출처 : 중국의 어제와 오늘 | www.chinabang.co.kr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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